선거와 디아스포라 - 하승우
작성일2018-09-11본문
선거와 디아스포라
2018년 6월 13일에 제 7회 지방선거가 실시된다. 지난 2016년에는 제 20대 국회의원 선거, 2017년에는 제 19대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2010년에 제 5회 지방선거가 있었고 2012년엔 제 18대 대통령 선거가 있었고, 2012년에는 제 19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다. 선거 전와 선거 후, 우리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변화냐, 유지냐’, ‘못 살겠다 갈아보자, 갈아봤자 소용없다’, ‘구정치, 새정치’, 이런 구호들은 이제 우리 선거판에 적용될 수 없다. 한국 정당의 평균 수명은 3년 2개월. 4년이나 5년에 한번 돌아오는 선거보다 주기가 더 짧다. 그러다보니 바꾸고 갈아서 평가를 하려 해도 이미 평가를 할 대상들이 사라지거나 새로이 헤쳐모여를 한 상태이다.
이런 상황인데도 카드 돌려막기 하는 것처럼 우리는 권력의 공백을 피하기 위해 이런 사기극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돌려막기를 아무리 잘 해도 수수료가 쌓이듯 견제를 받지 않는 권력은 부패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당선되고 난 뒤에 공개적인 약속(公約)을 헛된 약속(空約)으로 만드는 일이 빈번한 나라에 사는 우리에게 선거는 매번 무기력을 경험하는 과정이다.
선거는 민주적일까?
내가 속한 단체는 운영위원장을 사다리타기로 뽑는다. 얼마 전에도 임기 1년의 새로운 운영위원장이 사다리타기로 뽑혔다. 다른 단체들은 장(長)을 맡을 사람을 찾고 그 사람이 되어야 하는 이유를 설득하느라 많은 시간을 쓰지만 우리 단체는 십 분이면 끝난다. 당첨된 사람의 머쓱한 미소와 다른 운영위원들의 폭발적인 축하로. 녹색당도 한 해 사업을 결정할 대의원들을 추첨으로 뽑는다. 추첨으로 뽑힌 대의원들이 제대로 판단을 할까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직접 그 과정을 지켜본 사람들은 추첨제를 지지한다.
대표를 선출하는 방식으로 추첨제도의 의미와 중요성을 강조하는 책은 이미 여러 권 나와 있다. 버나드 마넹의 『선거는 민주적인가』(후마니타스, 2004년)와 어니스트 칼렌바크와 마이클 필립스의 『추첨 민주주의』(이매진, 2011년), 이지문의 『추첨민주주의 이론과 실제』(이담북스, 2012년)가 대표적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연구들이 정리되어 나와 있어도 추첨제도는 우리 사회에서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우리 사회가 추첨제도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를 추첨제도의 의미에서 찾을 수 있다. 마넹은 추첨제도의 의미를 “민중이 통치자이자 피통치자라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민이 이 두 위치를 번갈아 가며 차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민주주의 원리에서 찾는다. 그리고 이런 “교체와 추첨의 결합은 전문성에 대한 깊은 불신에서 비롯되었다.” 고대 아테네인들은 전문가가 필요하지만 전문가들에게 모든 권력을 맡긴다면 그들이 지배하게 되리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의미를 고려하면 한국에 추첨제도가 도입되지 못하는 이유를 잘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한국사회는 철저히 전문가 중심의 사회이기 때문이다. 언론이나 공청회, 어디를 가던 전문가들이 마이크를 독점한다. 오디션이 온갖 곳에 도입되었듯이 시민은 전문가의 심사를 통과해야만, 그들의 인정을 받아야만 무대에 설 수 있다. 이런 사회에서는 추첨제도가 뿌리를 내리기 어렵다.
사실 추첨제도는 어려운 것이 아니다. 『추첨 민주주의』는 미국에서 “추첨으로 새로운 하원 435명을 선택하는 시스템은 단순하고, 비용이 많이 들지 않으며, 조작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런 단순함과 쉬움이 지배층의 구성 자체를 손쉽게 바꾼다. “하원의 약 4분의 1은 블루칼라 노동자들로 채워질 것이고, 그 중 일부는 지역공동체회의나 노조집회에서 벌어지는 진지한 논쟁에 익숙한 사람들일 것이다. 만일 회의장 주변에서 간간히 사람들을 골라낸다면, 그중 10퍼센트 정도는 실업 상태에 있던 의원일 수 있다. 정리해고된 노동자, 재봉사, 요리사, 트럭 운전사, 선원, 점원도 있다. 아마도 이전에는 의원으로 선출될 가능성이 더 많았을 두 명의 의사나 치과의사, 한 명의 학교 관리자, 두 명의 회계사, 한 명의 부동산 중개업자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그런 사람들의 특권적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게 될 것이다. 의원들의 얼굴을 쭉 살펴보면, 이 나라를 구성하고 있는 평균적인 미국인인 평범한 노동계급 수백 명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논리를 받아들이면 추첨이야말로 고른 대표성을 보장하는 좋은 방법이다.
역설적이지만 바로 그렇기에 한국에서는 추첨제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제 19대 국회의원 당선자들을 보면, 40~50대가 전체의 74%를 차지하고 2/3가 전직 국회의원이나 정당인 등의 직업정치인이다. 그리고 남성이 84%를 차지한다. 이런 불평등한 사회이기에 그 사회를 무너뜨릴 수 있는 추첨제도는 위험하고 불온한 것이다. 그러니 제도의 난해함이나 실현가능성보다는 우리 사회의 불평등한 현실이 추첨제도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만일 이런 고민을 협동조합에 적용하면 어떨까? 협동조합은 전문가 중심의 조직도 아니고 대표성이 불평등하지도 않다. 어떻게 보면 추첨제도의 의미가 가장 잘 살아날 수 있는 조직이 협동조합이다. 협동조합의 이사, 대의원을 뽑는 방식이 꼭 선거여야 할까? (지원한) 조합원들 중 추첨으로 선택된 사람이 이사나 대의원을 맡으면 어떨까? 누구가 되든 능히 그 직책을 감당할 수 있으리라 믿고, 그런 과정을 통해 중요한 활동가로 성장하리라 기대한다면 협동조합은 탁월한 사람이 아니라 아마추어를 선택해야 한다.
물론 추첨제도가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누가 뽑힐 것인가?’라는 물음에서 ‘누구’ 역시 어떤 규정이기 때문이다.
디아스포라에게 선거란 어떤 의미인가?
『추첨민주주의』에서도 “특정 범주의 국민은 배심원과 지금의 의회에서 배제되는 것처럼, 하원의원 선출대상에서도 배제될 것이다. 미성년자, 유죄를 선고받은 중죄인, 오랫동안 병원이나 감옥에 수용된 사람, 외국인 거주자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고 얘기된다. 그렇다면 국내에 함께 살고 있는 미성년자와 외국인 거주자에게 민주주의는 어떤 의미일까?
디아스포라는 이산(離散), 즉 가르고 떼어진 사람들로 번역된다. 서경식은 『디아스포라 기행: 추방당한 자의 시선』(돌베개, 2006년)에서 “대문자의 디아스포라Diaspora라는 말은 본래 ‘이산’離散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이자 ‘팔레스타인 땅을 떠나 세계 각지에 거주하는 이산 유대인과 그 공동체를 가리킨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물론 사전상의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날 ‘디아스포라’라는 말은 유대인뿐 아니라 아르메니아인, 팔레스타인인 등 다양한 ‘이산의 백성’을 좀더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소문자 보통명사diaspora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졌다.”고 얘기한다. 디아스포라는 어쩔 수 없이 자기 땅을 떠나 떠도는 사람들, 낯선 땅에 정착한 사람들을 가리키고, 그렇기에 이들은 선거에 나서거나 투표권을 행사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선거란 ‘국민(國民)’으로 인정된, 국민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사람들의 잔치이다. 법이나 정책에 따라 국민으로 분류되지 못한 사람들은 선거에 참여할 수 없다. 한국 내에 살고 있지만 국민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주노동자들, 성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배제되는 청소년들은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존중받을 권리 자체를 거부당한다. 이들에게 선거는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다.
그리고 한국 정부나 기업은 자신들의 정책이나 방침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나설 때마다 그들을 배제해 왔다. 빨갱이, 종북, 불온세력으로 몰아서 한순간에 그 사람들을 비(非)국민, 해고노동자로 만든다. 국민이지만 국민이 아닌 사람들, 이 땅에 살고 있지만 뿌리를 내릴 수 없는 사람들, 이들이 디아스포라이다. 국민이지만 국민 대우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 사람이지만 사람 대우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디아스포라이다.
송전탑 싸움으로 고통을 당하며 제발 이대로 살게 놔달라고 외치며 농성하는 밀양주민들과 해군기지를 반대하는 싸움을 끈질기게 벌이고 있는 제주도 강정마을 주민들은 과연 한국의 국민일까? 힘을 가진 자들이 여기는 해군기지, 여기는 개발지역, 여기는 송전탑을 세울 곳이라고 마음대로 경계를 정할 때 그곳에 사는 주민들은 철저히 배제된다. 그럴 때 이대로 살고 싶다는 이들의 바람을 반영할 선거는 가능한가? 그리고 법정공휴일인 선거날에도 기업의 강요로 출근해야 하는 노동자들에게 선거는 어떤 의미일까? 이런 사람들이 직접 선거에 나서서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아무 것도 하지 않겠습니다’라는 선거공약이 과연 가능할까?
그런 점에서 선거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소수자들에게 다수의 의지를 강요하는 장치이다. 소수자들은 이런 현실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서경식 등의 대담을 담은 『경계에서 만나다』(현암사, 2013년)는 그런 상황에 처했던 사람들의 삶을 드러낸다. 그 드러남을 통해 우리는 디아스포라를 불쌍하게 여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상황과 조건에서 디아스포라가 될 수 있음을 자각하게 된다. “근대 국민국가 속에서 언제든지 벌거벗은 생명과 같은 처지로 떨어질 수 있는 국민인 우리들 또한 디아스포라와 전적으로 다른 위치를 점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란 우리의 깨달음이 중요하다.
그렇다고 우리 모두가 디아스포라라는 식의 선언을 하자는 건 아니다. 그보다는 나 자신의 처지를 자각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그래서 서경식은 “19세기 이후 국민화의 과정을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로 바라보는 사람들에 대한 대안으로, 좀 더 강하게 말해, 일종의 저항으로서 디아스포라적인 시각이 중요한 문제제기가 될 수 있



